나에게 있어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기억과 망각이 혼재된 과정이다. 좋지 않은 머리때문인지 나는 결코 어떤 책의 인상적인 문구 같은 것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이 주제를 압축할 수 있는 한마디로 된 구절이면 몰라도. 특히 대다수의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부지기수이니 이 정도면 기억력이 나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어렸을 적에는 최대한 기억을 하려고 애썼다. 이 작중 인물의 이름은 무엇인지, 그 특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암시하고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러나 나이가 들고 독서량이 늘어남에 따라서 그냥 그것을 포기하였다. 그냥 그 책의 핵심과 그 기조만 읽어내고 내 자신의 가치관과 비교한 후에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고칠 것은 고치면서 내 자신을 재구성하는데 최선을 다한 후에 나머지 것은 잊어버리는 것에 집착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래서일까? 태백 산맥의 주인공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그 기저 의식과 사회 상황에 대한 나름의 통찰력은 유지하고 있다고 믿으며, 노암 촘스키의 현대 사회 비판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그가 예로 든 것들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지엽적인 것은 별로 필요가 없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한권만 읽은 사람과 100권을 읽은 사람이 한권의 책의 지엽적인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그 지적수준이 어떠하건간에 100권을 읽은 사람이 불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한권의 책을 읽은 이가 100권을 읽은 이보다 더 통찰력이 높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1권의 책을 읽은 이가 가질 수 있는 통찰력이란 1권의 책에 의해 한정지어지는 통찰력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최근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세태가 나쁜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물론 나같은 사람에게는 책 시장이 좁아짐에 따라서 책값이 오르고, 예전 책들을 구할 수 없게 되는 일이 빈번해짐에 따라서 그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만큼 다른 이들이 다른 곳에서 정보를 얻어서 자신을 재구성해낼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한권의 책이 줄 수 있는 정보의 방대함이 웹에서 떠돌아다니는 정보의 종합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며, 이에 따라서 지식과 정보를 종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지엽적이고 전문적인 것에 치중된다는 경향이 아쉬울 뿐이다.

그냥 간단히 예를 들자면 녹음 연도나 지휘자, 연주자에 집착하며 다른 장르의 음악은 쓰레기로 취급하는 서양고전음악지상주의자와 같은 느낌이 든달까?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작곡자의 의도와 그의 미학적 취향을 받아들여서 정리, 비판하여 자신의 감성을 풍부하게하고 좀더 세상을 넓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함일 것인데, 지엽적인 틀안에서만 세상을 느끼려하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이들이 안타깝기 그지 없을 뿐이다.

물론 이런 나의 생각은 아날로그 시대에 태어난 자의 푸념일지도 모르며, 고도의 전문화를 파편화와 비슷한 것으로 간주하는 보수주의자의 낡아빠진 덜떨어진 주장일지도 모른다. 하긴 그래따지면 나는 전인적 인간상이 추구되던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났어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를 보는 관점에서도 똑같이 이용되는 것 같다.

정치건 경제건 문화건 사회의 그 어떠한 것도 결코 한가지 관점만으로는 정리될 수 없다. 정치나 경제와 비교적 거리가 멀 것 같은 순수 예술 분야도 그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여 작성되는 것이고, 이런 사회상을 만드는 것은 다름아닌 그 사회의 정치와 경제, 종교와 같은 것들이다. 세계 제2차대전에서 독일이 스페인을 폭격하지 않았다면 피카소 화백의 '게르니카'라는 명작은 결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의 시대적 열망이 아니었다면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는 시는 아마 한구석에 묻혀서 발굴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문제는 경제다.

아무리 한 개인이 자신의 부를 엄청나게 일구어내었다고 하여도, 그 사람이 한 사회의 부를 그렇게 일구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할 수 없다. 그 개인이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이야기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통찰력과 지식이 있느냐는 둘째문제이기 때문이다. 명동의 사채업자가 개인적인 부는 축적할 수 있어도, 그가 정치 지도자로서 다른 이들을 배부르게 할 수있느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사회의 문제는 좋은 정치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무지하고 편파적인 정치인이 많은 것이 문제다. 전문가의 역할은 그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내서 발전의 보조에 도움을 주는 것이지, 그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아니다. 의사가 대통령이 되면 한국 사회의 구성원의 건강이 모두 건강해질까? 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보다는 의사 집단이 좀더 편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의사는 의학의 틀로만 세상을 바라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제 취임한지 한달 남짓되는 이명박 대통령이 그의 말에 따르면 경제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개인적으로는 꼭 그랬으면 한다. 적어도 최소 10년 정도는 내가 살아갈 것이라고 추정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갖춰야할 것은 경제에 대한 관점을 갖추고 기업체를 운영하던 경험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고, 다른 각 분야의 문제점을 분석하여 그것을 전문가에게 묻고 큰 방향을 제시하는 큰 물줄기를 잡는 것이다. 50개 품목을 직접 지정하여 서민의 물가 안정에 도움이 되도록 챙기는 것은 좋다. 법무부가 컬러 인쇄하지 않은 흑백보고서를 내는 것을 칭찬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큰 방향과 이념을 제시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오해와 오보가 점철되고 지엽적인 것에 집착하는 실용주의로는 결코 국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과감히 지엽적인 것은 잊어버렸으면 한다. 그것보다는 사회와 국가가 나아가야 할 큰 방향을 지시해주기를 바란다.
배추값을 억제하는 것보다는 배추값을 걱정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대통령으로서 해야할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