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에는 크게 2가지 종류가 있다. ‘평등이면 다 똑같아야지, 평등에도 차별이 있냐!’ 라고 흥분하실 분도 계실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사실이다. 어쩔 수 없다. 민주주의라는 체제가 도입되면서부터 시작된 평등에 대한 고찰은 개념적으로는 2가지 종류의 평등을 형성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고 이는 고대 그리스부터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산술적 평등’과 ‘비례적 평등’으로 나뉘게 된다. ‘산술적 평등’과 ‘비례적 평등’을 12년간 교육과정에 맞춰서 풀이하자면 ‘결과의 평등’과 ‘기회의 평등’으로 나뉘게 된다. 많이 들어봤던 말 아닌가?
산술적 평등이란 다른 어떠한 전제조건에 상관없이 사람이 행한 일이라면 똑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고, 비례적 평등이란 똑 같은 기회를 주되 그 결과는 개인의 능력에 맡긴다는 것이 골자가 된다. 예를 들자면 산술적 평등이란 위대하신 김정일 장군의 영도하에 오늘도 로동에 매진하는 협동농장에서 일하시는 북조선 인민분들이 되겠고, 비례적 평등이란 빌어먹을 상사에게 쪼여가며 오늘도 밤잠설치면서 일하시는 성과급에 목숨 건 남한의 직장인이 되겠다. 이렇게 보니까 산술적 평등이 더 좋을 것 같지?
사실 산술적 평등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휴머니즘의 완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 사람이 어떠한 능력을 가졌던 간에 하나의 인간으로 취급하고 그들이 노력하는 것을 인정하되 책임은 묻지 않는 천국 같은 사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문제는 ‘천국 같다.’는 것이다. 서울 특별시민이야 전임 시장이신 이명박 전 서울시장께서 서울을 통째로 하나님께 가져다 바침으로써 지옥 같은 천국에 살고 있지만, 사실 모든 사람이 내가 천국에 살고 있다고 여기는가? 산술적 평등이란 개개인의 능력차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각 개인이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건강한 발전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결과를 보여주게 된다. 당장 북한만 보라. 그네들은 먹을 것과 전기가 없어서 세계 여러나라에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핵으로 협박하며 구걸하고 있지 않은가?
반면에 비례적 평등이라는 개념은 원론적으로 보면 ‘도대체 저게 왜 평등이야!’라고 할지도 모를 개념이다. ‘평등이면 다 똑같아야지, 누구는 잘나가고 누구는 밥 굶는 것이 말이 되냐!’ 라는 말을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 그 분들에게 조선 시대의 예를 들어드리고 싶다. 원칙적으로 조선 시대의 ‘과거 시험’은 노비를 제외한 모든 계층에 열려있었다. 문제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선 과거 시험이라는 것이 한자 능력 검정 시험 및 논술 시험의 복합형이었기 때문에 그 준비에 있어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사실상 이러한 점은 기존 기득권 세력인 ‘양반층’이 아닌 다른 평민들에게는 쉽사리 범접하지 못할 시험이라는 개념을 낳게 되었다. 더군다나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사회적으로 고착화 되어 가면서 평민층은 글을 배운다는 것 자체가 무엄하고 괘씸한 일로 취급되어버린 것이다. 그런고로 ‘과거 시험’이라는 것은 기득권 층 내에서 이루어지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갔던 것이고, 양반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 아니라면 그 기회조차 박탈당해버린 일이 된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이런 양반 아닌 자들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비례적 평등’을 실천하였다. 누구나 초, 중등 교육은 의무적으로 받게 나라에서 강제하였으며, 이는 국민의 의무로 규정함으로써 지키지 않을 경우 그 부모를 법에 따라 처벌시키는 강제 규정으로 행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비례적 평등에 대한 도전이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정부 부처에 의해서. 그렇다고 노무현이 빨갱이라는 소리는 아니고, 교육부의 내신에 대한 알 수 없는 신념이 그것이다. 공교육 강화와 사교육 근절을 목표로 생겨난 ‘내신’은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전국 모든 학교의 실력은 같으며, 그 차이는 인정하지 않겠다.’라는 폭력적이고 기만적인 산술적 평등에 그 이론을 근거한다. 좋다 그것까지는 받아 들일 수 있다고 가정하자. 문제는 대학에 대해서는 같은 이론을 적응시키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대학이 유럽의 일부 국가와 같이 지방 할당제로 그 지역 사람만을 뽑을 수 있게 되어있고, 국가적 예산에 따라서 전국적으로 동등한 수준의 설비와 교수를 갖출 수 있게 된다면 저기 있는 ‘내신’이라는 개념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무슨 문제가 있으면 ‘서울대 망국론’을 들먹이면서 ‘저런 대학은 빨리 폐지시켜야한다.’ 라던가 ‘전국 모든 대학의 이름을 서울대학교로 바꾸자.’라는 하등 생산적인 것 없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지껄여대면서, 절대로 전국 모든 대학을 평준화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고 있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국의 대학들을 철저하게 가지치기하고, 살아남은 대학에는 국가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데 그럴 경우에는 대학 인원수가 무지하게 줄면서 자기 자식이 대학갈 확률이 엄청나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내 말이 틀렸는가?
우리 나라의 모든 부모는 자기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기 자식이 서울대를 갈 것으로 믿는다고 한다. 농담삼아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이 이야기 속에는 깊은 뜻이 담겨져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입신 양명을 위해서는 적절한 수준 이상의 학위가 필요하다는 것과, 서울대는 그 학위의 상징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허접한 대학이라도, ‘학사’ 학위를 지닌 것과 ‘고졸’의 차이는 극복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총체적 난국 상황에서 ‘내신’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고, 그 결과는 어떠한가? 내가 고등학교 재학 중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내신 성적 다르고 수능 성적 다르게 나온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던가? ‘내신’이라는 객관적 기준이 모호하고 교사 개개의 자질에 따라서 갈리는 시험을 꺼내듬으로써, 교육인적자원부-절대로 교육부가 아니다.-는 시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객관성이라는 잣대를 스스로 포기하게 되고, 이러한 것을 ‘산술적 평등에 따라서 원래 다 똑같아!’라고 우기는 어이없는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러한 것을 대학에 강요함으로써 그 가치를 더욱 떨어뜨리게 되고, 각 대학들인 사실상 비교내신이라는 불법과 내신 실질 반영 축소라는 편법을 동원함으로써 저항하게 되었다. 왜냐면 대학은 각기 스스로를 차별화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지, 정치인들처럼 선거에서 표를 받음으로써 가치를 높이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솔직한 말로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전국에 있는 대다수의 ‘인문계 고등학교’ 출신은 실업계 고등학교의 내신 전교 1등이 인문계 고등학교의 내신 전교 100등 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실업계 고등학교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떨어진 학생들이 가는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고등학생도 아는 이러한 비례적 평등이라는 개념을 교육인적자원부는 애써 모른 척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신은 겉보기에는 그럴 듯 하지만 사실상 산술적 평등에 근거한 폭력적인 행위이며, 이는 시급히 시정되어야 한다. 아니면 대학의 수를 줄여서 지역 할당제 및 전국 평준화를 시켜주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