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상, 다들 한번쯤은 해보지 않았을까?
세찬 빗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아니 이미 귀에 거슬린다는 수준을 넘어서서 공포스러움을 느끼게 만든다. 누군가가 나에게 비를 무서워하는가라고 물었다면 아마도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었을 것이다. 오늘 아침까지는. 오늘 아침 이 세상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광경을 보고 나서 나는 비가 온다는 것이 공포감을 느끼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렇다고 내가 태풍으로 인한 침수지역에 있는 것도 아니며, 홍수로 전 재산이 쓸려나가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오늘 눈을 뜨면서부터 겪고 있던 일. 별 것도 아닌 일인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은 내가 두려움에 벌벌 떨도록 하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겁이 많은 것도 아니다. 공포영화라던가 괴담류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며, 학교에서 갔던 수련회 같은 것에서 담력 시험을 할 때에도 웃으면서 목표지점까지 갔던 사람이다. 누군가 말하기로 세상에서 그 어떠한 것보다 공포스럽다는 물을 받아놓은 욕조에서 모든 광원을 차단한 채로 30분 이상 버티기도 해본 사람이다. 솔직히 그 때는 조금 무섭긴 했지만, 그래도 결국 버티고 나왔다. 하지만 오늘의 일은 신기함과 경이로움을 넘어서서 공포감을 자아내고 있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뜰 때만해도 이런 느낌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장마철의 쏟아지는 세찬 빗줄기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깼을 때에도,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심하게 비가 내리네.’라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흐리멍텅한 뇌에 하품을 해서 산소를 공급하고 습관적으로 커피를 갈아 커피메이커에 넣고 내린 후에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샤워를 했을 때까지만해도, 오늘 아침은 평상시와 다름없는 여름 장마철 하루의 시작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조금 개운해진 기분으로 커피를 따라 햇살이 찬란하게 비치는 여름의 산기슭이 보이는 베란다에 가기까지는.
처음엔 ‘뭐야 벌써 비가 그쳤네? 소나기였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은 날이 맑으니 빨래라도 널어볼까라는 생각으로 뒤를 돌아선 순간, 반대편 창가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순간 들었던 황당했던 느낌. 그리고 그 느낌을 더욱 북돋아주려는 듯이 때마침 내려치는 번개와 연이어 들리는 천둥소리는 순간적으로 어린 시절에 보았던 만화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하였다. 핑크팬더였는지, 톰과 제리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선한 역의 캐릭터가 서있는 곳은 햇볕이 쨍쟁하고, 악역이 서있던 곳은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리던 그 장면은 어린 시절부터 약간은 동경해왔지만, 머리가 굵어짐에 따라서 어느 순간 포기했었던 광경이었다. 그리고 지금 어린 시절의 꿈이 실현되었을 때, 가장 처음 느꼈던 감정은 ‘우와 멋지다!’라는 순수한 의미의 감탄보다는 ‘이거 뭐야!’라는 황당함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어이없는 감정을 가지고 기상청 홈페이지라도 접속하고자 컴퓨터를 켰는데 전원을 누른 순간 ‘퍽!’하는 소리가 나면서 더 이상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연속해서 몇 번이나 버튼을 눌러보았지만 옴짝달싹도 하지 않는 컴퓨터를 보면서 정전이라도 생긴건가라며 뜨거운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잠깐 그러고보니 커피가 뜨거운 것이 이상하다. 아니 그 전에 커피 자체가 나왔다는 것이 더 이상하다. 핸드 드립이 귀찮아서 커피메이커를 마련했었는데 그것은 전기로 가는 것이 아닌가? 혹시 컨센트라도 빠진건가해서 전원을 확인해보았는데 컨센트는 이상없이 잘 연결되어있다. 혹시나해서 책상 위에 있던 스탠드를 켜보아도 전혀 반응이 없다. 그 사이에 두꺼비집이라도 내려갔는가 싶어서 두꺼비집을 열어보니 스위치는 다 정상적으로 올라가있다. 정전으로 마음 속에서 이번 사태의 원인을 확정짓고 컴퓨터가 켜지지 않는다는 것에 약간 짜증을 부리며 다 마신 커피컵을 채우기 위해 커피메이커에 얹혀져있는 유리 주전자를 들어올리던 순간 손을 델뻔했다. 어찌된 일인지 커피메이커는 빨간 불빛으로 자신이 열심히 일함을 티내면서 보온 작용을 하고 있던 것이다. 커피메이커가 배터리로 가는 것도 아니고 다시 전기가 들어왔는가라는 생각에 컴퓨터를 켜보니 역시나 묵묵부답이다. 그러고 보니 커피메이커 옆에 놓여있는 냉장고도 자신의 역할을 뽐내듯 냉각팬을 열심히 돌리고 있다. 정말로 기가 차는 황당함에 내 방쪽을 들여다보고는 이 사태의 진짜 원인을 깨달았다. 내가 한번도 본적이 없을 정도로 세차게 내리는 비. 그리고 아마 그 비가 내리는 지역에 위치한 가전제품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출근은 해야겠기에 우산을 챙겨서 현관으로 나가려고 했다. 손목 시계를 보니 7시 20분. 이 정도의 비가 오니 평상시보다 10분은 먼저 나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허겁지겁 챙기고 전자식 문 개폐장치의 버튼을 누르는 순간 들려야 할 신경이 거슬리는 기계음이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덤으로 문도 열리지 않았고.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특별히 가져갈 것도 많지 않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상을 뒤져 입주이래로 한번도 쓴적이 없던 비상용 스페어키를 챙긴 후에, 배터리가 떨어질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 놓은 전자식 개폐장치의 수동 손잡이를 돌리고 나가 문의 재래식 자물쇠를 잠그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으나 역시나 엘리베이터도 움직이지 않았다.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계단마다 걸려있는 자전거를 헤치고 1층으로 뛰어 내려가서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으나 마찬가지로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지금 내리는 비가 방전을 일으키는 것도 아닐텐데 비가 내리는 모든 지역의 기계가 작동하지 않는다니!
거의 반 미칠 것 같은 머릿속을 부여잡고 그래도 지하철은 움직이겠지라는 희망을 품고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 우산을 쓰고 뛰어가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기름값은 어느 정도 보조가 되고, 지하철은 빙빙 돌아가는데다가, 뛰어서도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라 어지간해서는 지하철을 탄 적이 없어서 크게 눈에 익숙하지는 않은 길이었지만 겨우 비를 뚫고 도달한 지하철 입구에서 우산을 접고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그 시계는 여전히 아침 7시 2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젠장 시계도 멈춰있었던 것이다. 늦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를 보니, 그것은 마치 입을 활짝 벌린 괴물의 아가리처럼 시커먼 암흑을 자랑하고 있었다. 역무원에게 물어볼 생각으로 담력시합에도 떨지 않았던 심하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손잡이에 의지해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서서히 익숙해지는 암흑 속에서 개찰구에 도달한 순간, 나는 처음으로 무서워죽겠다는 말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당연히 출근해있어야 할 역무원도 자리에 없었던 것이다.
외로워서 무섭다는 말. 단지 그것은 심약한 사람들의 헛소리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으아아악!’하는 철이 든 다음부터는 한번도 질러본 적이 없던 비명을 지르면서 반대편으로 돌아나와 다시 계단을 타고 지하철 입구로 나온 순간, 나는 다시금 공포란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북적대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방금 전에는 뛰어오느라 들어오지 않았던 거리의 풍경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뛰어오느라 정신이 없어서 못봤겠거니 했던 사람들, 지금쯤이면 당연히 보여야 할 출근하는 사람들이나 등교하는 학생들은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얼이 나간 표정으로 지하철 역 입구에 서있었을 것이 분명한 나를 제외하고서.
뒤를 돌아보면 무엇인가가 튀어나와 나를 잡아갈 것 같다는 생각으로 우산도 내팽개치고 미친 듯이 달렸다. 큰 맘먹고 산 양복도, 젖은 양말이 싫어서 비오는 날이면 항상 조심해서 신고 다녔던 구두도 내 머릿속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 때 내 머릿속을 지배했던 생각은 오직 하나,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찬란한 햇빛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체력장이 내신에 들어간다던 말도 안되는 소리에 죽을 힘을 다해 뛰었던 100미터 달리기 정도의 속도로 아파트 입구에 들어선 나는, 숨도 돌리지 않고 13층이나 되는 층계를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내려올 때만 해도 혹시라도 옷이 걸릴까 피해가면서 내려왔던 자전거도 더 이상 염두에 둘만한 것은 아니었다. 앞에 걸리적 거리는 것은 몸으로 부딪혀가며 간신히 도착한 내 집의 입구에서 간신히 숨을 돌리며 열쇠를 걸어 넣고 돌렸다. 철컥하는 묵직한 쇳소리, 이 소리가 이렇게 안심이 될 줄은 한번도 상상 못했다.
집안으로 뛰어들다시피하며 신발도 제대로 벗지 않고 햇빛이 내려쬐던 베란다로 달려간 나는 그제서야 겨우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내 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양복은 자전거에 걸렸는지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고 바지는 주머니 부분이 튿어져 있었으며 구두는 뛰면서 한번 살짝 벗겨졌었는지 발 뒤꿈치가 닿는 부분을 밟은 것 처럼 타원형의 선을 내며 접혀져있었다. 마지막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힐끗 쳐다본 손목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맹렬한 속도로 돌고 있었다. 그 동안 멈추었던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할 것처럼. 그리고 내 심장의 박동수는 그 속도에 맞춰서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한참을 강하게 돌다가 1시 근처에 도달할 무렵부터는 다시 원래 속도로 돌아왔다. 아니 한번도 본적이 없을 정도로 강하게 돌아가는 시계바늘을 보았으니, 과연 이게 제 속도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내 체감상으로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든 이후에야 점차 안정을 되찾을 수가 있었고, 비에 젖어 뜹뜹한 몸을 말리기 위해 옷을 벗었다. 아마도 평소였다면 베란다에서 옷을 벗는 해괴한 짓거리는 하지 않았겠지만, 당시 나에게는 이 햇빛을 받지 못하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창 밖으로 보이는 산을 바라보면서 잠시 심호흡을 하고 대충 젖은 옷을 늘어놓은 후에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빛이 들어오지 않는 집안으로 큰 맘을 먹고 걸어갔다. 간신히 옷을 갈아입고 회사에 연락해봐야지하는 생각에 휴대폰을 꺼내 들어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뚜르르륵 하는 소리만 전해질 뿐, 전화를 받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햇빛이 들어오는 곳에서도 나는 여전히 혼자였던 것이다.
꿈이 아닐까라는 희망으로 볼을 꼬집어도 보았지만, 따끔하게 느껴지는 볼에서 전해오는 통각은 이것이 현실임을 깨우쳐 주었다. 미칠 듯이 다가오는 공포. 더 이상 나에게 비는 비로 보이지 않았다. 슬래셔 무비에서 자주 나오는 뿜어져 나오는 피가 비로 변해 내린다고해도, 이것보다 무서울 것 같지는 않다. 모든 것이 멈춰있는 공간에서 오로지 밑으로 계속해서 떨어지는 비는, 그것 자체로 이 세상이 끝나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덜덜 떨려오는 몸을 덮기위해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방에서 이불을 가져와 끌어안은 채로 베란다에 계속해서 앉아 있었다. 그 와중에 쳐다본 시계는 천천히 느릿느릿 제 시간을 걸어갔고, 이 것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나에게 있어서는 현재까지는 정상임을 나타내주는 희망의 표시이자, 아직 버텨야 할 시간이 끝없이 남았다는 악몽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악몽은 오후 5시경 커피메이커보다는 좀 더 비가 오는 쪽에 가까이 있던 냉장고가 멈추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비는 그 자리에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점차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은 햇빛이 비치고 있으나 점점 비는 나에게로 다가오고 해도 점차 뉘엿뉘엿 져 갈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햇빛이 보이지 않는 순간, 나도 더 이상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나도 이대로 저 빗속에 묻혀서 사라져갈까? 아직 햇빛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나의 몸은 베란다 밖을 날았다. 점차 다가오는 대지를 느끼면서 위로 올려다본 하늘은 검은 구름과 파란 하늘이 정확히 양분을 하고 있었다. 그래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뛰어갈 것이다. 햇빛이 끊임없이 비치는 곳으로. 우선 무사히 착지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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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두운 글이 좋아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