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뇌사 상태에 빠진 아들을 위해서 자신의 손으로 인공호흡기를 떼내어 안락사를 시킨 아버지가 검거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사실 아들은 이미 그 전에도 진행성 근이영양증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기사에 나온 것이 사실이라면 진행성 근이영양증 중에서도 가장 예후가 좋지 않은 DMD(Duchenne Muscular Dystrophy)를 앓고 있었던 듯하다.
DMD란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온몸의 근육 세포가 서서히 자신의 기능을 잃어서 그 활동을 멈추는 것을 말한다. 아쉽게도 현재로서는 특별한 치료법이 없고 보조적인 수단으로 최대한 삶의 마지막까지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단순히 몸의 근육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 라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혹시라도 숨이 가빠서 심호흡을 해보신 분들이라면 대충 무엇이 문제가 될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호흡을 주관하는 폐라는 장기는 굉장히 물렁물렁해서 횡격막이라는 여러 근육이 뭉쳐진 일종의 막과 보조호흡근이라는 흉곽을 둘러싸는 근육이 없이는 스스로 그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 그리고 DMD는 이러한 근육에 까지 침범하여 호흡할 수 있는 여지를 빼앗게 된다. 기사 내용으로 보았을 때, 이미 아들은 자발 호흡이 불가능 상태까지 도달한 것 같고 그로 인한 뇌로의 산소 공급 부족으로 뇌사 상태에 이르게 된 것 같다.
자 그럼 다시 돌아가서 인간의 죽음은 더 이상 심장사가 아닌 뇌사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에 두고 위 사건을 다시 살펴보자. 이 경우 아버지가 행한 행동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이미 죽어버린 시체에서 인공호흡기를 떼어낸 것인데 이것이 어찌 살인죄가 될 것인가. 오히려 시체를 훼손시켰다고 주장한다면 그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이번 사건에서 안락사라는 것은 전혀 존재할 수가 없는 개념이다. 아쉬운 점은 기자나 법관이나 이러한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는 것이지만.
안락사라는 개념은 인간은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는 인권 단체의 주장에서 처음으로 대두되게 된다. 사람은 죽음 그 자체보다는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통증이나 두려움 같은 부산물을 더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발생한 주장으로, 이는 자백을 하게 되면 죽음이 확실한 상황에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허위 사실이라도 자백을 한 수많은 고문 희생자의 예가 뒷받침하게 된다. 그리고 인권단체는 이것을 나을 희망이 없는 환자에게 적용시키기 위해 안락사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인간은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 첫번째 근거이며,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서는 고통을 받고 추하게 죽기보다는 인간다움을 지키면서 깔끔하게 죽기를 바라는 사람도 존재한다는 것이 그 두 번째 근거이다. 그리고 이러한 안락사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서 온전하게 대다수의 나라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호스피스라는 개념을 널리 퍼뜨려서 죽어가는 환자(흔히들 terminal이라고 한다. 절대로 좋은 말은 아니지만.)의 인권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기회를 마련하게 되었다.
안락사에는 크게 적극적 안락사라는 개념과 소극적 안락사라는 개념이 존재하게 된다. 간단히 설명해서 적극적 안락사라는 개념은 환자가 편안히 죽을 수 있도록 특정한 의료 조치를 시행해주는 것을 의미하고, 소극적 안락사라는 개념은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되 환자가 죽거나 특정한 의료 조치를 취해서 살더라도 심각한 후유증이 예상될 때 그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대다수의 경우에서 소극적 안락사라는 개념은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현 상황이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DNR(Do not resuscitate)로 대표되는 소극적 안락사라는 것은 자신이 죽음의 위기에 닥쳤을 때, 괜히 살리려는 노력을 하지 말라는 환자의 의지를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환자 자신이 충분한 검토를 갖추고 결정하게 되어있으며, 환자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철회할 수 있는 선언이다.
그러나 문제는 적극적 안락사라는 개념이다. 본인이 알기로 전 세계에서 네덜란드만이 그 개념을 인정하고 있고 적용 가능할 정도로 지지 받지 못하고 있는 개념이다. 미국에서도 유명한 케보키언 박사는 이 때문에 죽음의 의사라 불리며 철창행을 지기도 했고. 그리고 이러한 대립은 의학계에서도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아서 찬반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주제이다. 본인이야 적극적 안락사를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문제는 이 적극적 안락사라는 개념이 악용될 여지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적극적 안락사는 인간은 자유의지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본래의 주장이 훼손되기 쉽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긴 병수발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심각하게 아픈 가족 구성원이 존재한다면 가족간의 불화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경제적 사정이라도 여유가 있다면 모를까,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면 그야말로 가족이 해체되는 것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가 진정한 자신의 의지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쉬운 일 일까? 인간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듯 사람은 개인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게 된다. 더군다나 우리 사회와 같이 가족 중심적 사회에서 자라온 이들이 환자가 되었다고 자기 개인만을 생각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경제적인 압박에 시달리는 가족들 때문에 살고 싶다는 의지를 꺾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즉 환자는 자신의 의지로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눈치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결과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장기 밀매단 등에 의해 악용될 수 있다. 와 같은 주장도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법적 영역으로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허나 자신의 가족마저 환자에게서 격리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람이 어찌 신이 주신 삶을 포기할 수 있느냐라는 종교 윤리적인 면을 떠나서도 적극적 안락사라는 것은 실체화 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실에서는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천국과도 같은 이상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이러한 환자들에게 모두 국고지원을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사람은 사람이 아닌 인간이 되는 순간부터 발전을 해왔지만 그 만큼 슬픈 운명의 폭탄을 끌어안고 살도록 설계된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