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아고라에 아주 재미있는 글이 하나 나타났다. 다음 아고라 특성상 낚시가 횡횡하고 이번 글도 ‘카더라’ 통신의 범주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니 사실 여부는 전혀 확인이 되지 않지만, 그 밑의 댓글들을 보고 있자니 아직 우리 사회는 갈 길이 멀었다고 느낀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이란 그 사회의 어떠한 도덕 규칙이나 상식을 뛰어넘는 힘을 보인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헌법이고 그 아래로 수많은 법들이 헌법에서 미쳐 규정하지 못한 경우에 대해서 제제를 가하고 있다. 이전에 비슷한 류의 글을 썼을 때도 비슷한 말을 했지만, 법이란 사회 상식의 총화이며, 사회의 변화에 의해서 상식에 변화가 생겼다면 현존하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개정이나 폐지, 대체 법안의 입법으로 교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현재 존재하는 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현존하는 법의 테두리 내에서 선거 때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후보에게 투표를 하던가, 헌법 소원을 내던가, 시민 운동 등으로 여론을 작성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는 법에 기초를 둔 원리-원칙이 지켜지는 사회라는 전제에서만 올바로 작동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법치주의 사회에서 부도덕하지만 법에 어긋나지 않는 일을 할 경우에는 도덕적으로 비난을 할 수는 있겠지만, 법으로는 결코 처벌할 수 없다. 또한 아무리 불법적인 일을 생각하고 계획했다고 하더라도 실행하지 않았다면 결코 처벌할 수 없다. 첫 번째야 그렇다고 이해하지만, 두 번째는 이해가 가지 않는가? 법치주의의 기본이 되는 법은 ‘불법 행위’를 규정하고 있으며, 이는 객관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다. 사람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간단히 생각해봐, 범죄 계획을 짜는 것이 처벌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라면 ‘범죄의 재구성’ 같은 영화는 나오지도 못하게?
물론 법치주의에 대해서도 고대 인류 사회에 법이란 개념이 도입되면서부터 ‘Rule by law’ 1와 ‘Rule of law’ 2간 치열한 투쟁이 있어왔다고 알고 있으며, 오랜 역사를 거쳐 현대 사회에 가까워져 올 수록 ‘Rule of law’가 대세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몸이 불편한 보행자가 걸음이 느려서 보행 신호가 끝나기 전에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했을 경우, 신호가 바뀌었으니 보행자가 죽든 말든 닥치고 차를 돌진시키는 것은 ‘Rule by law’에 해당하고, 비록 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사람의 안전이 교통 신호의 준수보다는 중요하다는 상식을 가진 사회에 맞춰나가기 위해서, 그 보행자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Rule of law’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물론 이러한 법 적용의 예외에는 사회의 보편 타당한 상식에 맞춰서 이상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간단히 생각해보자면 술집에서 맞고 온 아들에 대한 보복을 위해서, 자기 부하들 시켜서 조져버린 아버지를 ‘법은 사람을 위한 것이므로, 사람의 자유는 법보다 소중하니까요!’라면서 그냥 풀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3
그렇다면 위의 개념을 머리 속에 둔 채로 다시 한번 글을 읽어보자. 수능이라는 대국민 행사에 참여하는 수험생들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아야 할 의무’를 가지는 대신, 동시에 ‘부정행위로 인해 피해를 받지 않을 권리’를 획득하게 된다. 또한 ‘부정행위를 발견했을 경우 신고할 수 있는 권리와 해야만 하는 의무’를 갖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부정행위’의 개념에 대해서 쪼잔 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세세하게 나열된 규정을 고지 받게 되어있으며, 상기 행위를 할 경우 ‘당해 성적 무효 및 2년간 응시 금지’라는 처벌을 받게 된다. 이 ‘부정행위’에 속하는 것에는 분명히 ‘시험 시간 종료 후 답안지 작성 금지’ 항목도 들어가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보았던 2001년 수능에도 있던 항목이 없어지지는 않았을 테니.
분명히 이 고3수험생은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철저하게 실행하였다. 그가 원리-원칙에 입각한 정의감에 불타올라서 그랬는지, 저 찌질이를 떨구면 내가 그 만큼 등급이 올라갈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그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불법인지 아닌 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상이 아닌 행동으로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므로.
‘좋다. 거기까지는 이해한다. 그러나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선처를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실 분들도 계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헛다리 짚으셨다. 수험생에게는 부정행위라고 생각되는 것을 신고할 권리와 의무는 있지만, 부정행위로 의혹되는 행위를 판단하고 처벌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는 없다. 이 권리 수험생에게 주면 평소에 맘에 들지 않았던 놈들에게 마구 남발하고 돌아다니게? 여기서부터는 ‘감독관’의 일이다. 감독관이 판단하기에 명백한 부정행위라고 생각된다면 수능 부정행위자로 등록하고 퇴출시키면 된다. 부정행위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그냥 진행하면 된다. 그러나 이곳에서 감독관은 그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제3의 길’을 택하는 열린 정신을 보여주었다. 부정행위로 판단을 했으되 불쌍하니 봐주자는 새로운 길. 미치겠다. 이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분명 수능 감독관에게는 부정행위를 판단하고 처벌할 권리와 의무가 주어지기는 하지만, 처벌의 내용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권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법치주의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아 예전에 치과의사 면허 소지자이자 현직 판사로 일하시는 분의 블로그에서 본적이 있는 ‘권리불쌍설 4’이 무럭무럭 머리 속에 피어 오른다.
만약 저 삼수생이 불쌍하다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라. ‘시험 시간 종료 후 30초 이내에는 답안지 마킹이 가능하다.’는 규정을 넣으라고. 방금 전까지 고3 수험생이 너무했다고 투덜댔던 사람들 문장으로 보니까 이상하지? 이것이 바로 이 사건이 상식에 어긋난다는 증거이다. 법이라는 것은 상식과 사회의 수호자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오히려 더욱 가중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사태의 주인공이 ‘삼수생’이라는 것이다. 삼수생이란 말 그대로 수험을 3번째 다시 치름을 의미한다. 수험 생활을 외국에서 하지 않은 바에야 분명히 이번 수능은 3번째 수능이었을 테고 다른 사람들보다 부정행위에 대한 세세한 규정은 2번이나 더 들어보았다는 말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행위를 자행했다는 것은 ‘사회의 규칙을 지키려는 의지가 없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자’임을 의미하거나, ‘지난 2번의 시험에서 저런 부정행위를 저질렀어도 처벌받지 않아서 이번에도 가벼운 마음으로 반복적으로 부정행위를 저지른 악질 범죄자’임을 의미하거나, ‘남들 1번 들으면 이해하는 규정을 3번이나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지진아’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라면 어차피 수능도 보지 못할 2년간 정신과 폐쇄병동에서 교정을 좀 받아야겠고, ‘반복적 악질 범죄자’라면 불쌍할 이유가 하등 없다. ‘지진아’라면 조금 불쌍하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규칙인데. 지금부터라도 사회의 규칙을 열심히 배워서 적응을 해보기를 바란다.
원리와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가 올바른 사회이다. 내 자신조차 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에서는 현실에 타협하여, 원리와 원칙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본인은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이에 대한 비난을 기꺼이 받을 각오는 되어있다. 남들도 다 하는 것이니까 봐주자?
‘죄 있는 자도 돌을 던져라. 던져본 돌의 무게를 깨달은 자는 다음에는 돌 맞을 죄를 행하지 않을 것이다.’
- 기계적이고 전체주의적으로 어떠한 예외 규정 없이 법을 집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법에 의한 철권 통치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 법에 의한 통치를 기반으로 하되, 사회의 주체가 적법한 절차에 따라서 법을 수정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식적으로 납득이 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법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예외를 둘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 [본문으로]
- 물론 사장이 구속되면 망해버리고 말아버릴 부실한 구조의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Rule of law를 외치며 예외를 적용한 판사가 있다는 슬픈 현실도 망각해서는 안되겠다. [본문으로]
- 대한민국의 법조계는 불쌍한 사람에게 법리를 우대하여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자조하는 농담을 의미한다고 본 것 같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