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삐딱한 시선을 지닌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사람이다. 그리고 난 잘되면 내 탓, 안되면 조상 탓이라는 고대의 지혜를 빌어서 이 것을 내 성장 환경 탓으로 돌려보려 한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나는 울산에서 내 유년기의 대다수를 보낸 사람이다. 울산이라는 동네는 큰 부자는 없지만 대개가 고만고만한 소득을 올리는 어찌 보면 가장 바람직한 경제상을 보여주는 곳이다. 그리고 경남 지방에서 가장 비 경남출신의 이주자가 많은 도시 중 한군데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나는 굉장히 모순적인 환경 속에서 자라왔다. 아버지가 울산으로의 이주를 굳히시고 개업을 하시기 전에 병원에서 제공했던 주택은 비교적 균등한 부의 분포를 보이는 곳이었다. 비록 지금은 SK의 대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내가 살던 아파트 뒤의 초원지대였으며, 그곳에는 잠자리며 메뚜기, 귀뚜라미 등이 득시글거리던 자연 환경의 보고였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동네 친구들과 함께 이런 곤충들을 잡으러 다니고 곤충 채집이라는 숙제를 하는 데에 있어서 천혜의 환경이었던 곳이었다[각주:1]. 그러나 아버지께서 개업을 하시고 그 주변의 새로 지어진 아파트를 골라서 이사를 하셨을 때 나는 굉장히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내가 이사했던 아파트는 당시 아파트 시공 회사가 동시에 건설한 sports complex 건물이 아파트 바로 옆에 위치했던 울산 지역에서 굉장히 비싼 아파트 중 하나였으며, 그곳에 살던 사람들 중에는 구시가지 지역[각주:2]에 의원을 개업하고 있던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의사들과 꽤나 건실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동시에 아파트 담장을 한 발짝만 벗어나도 울산 시내에서 가장 낙후된 동네가 펼쳐져 있었다. 이게 어느 정도 수준이었냐 면 본인이 살던 곳에서 5~6분 정도만 걸어가도 꽤나 대규모의 홍등가 비슷한 곳이 펼쳐져 있었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현재 서울로 치면 용산에 대규모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있고 그 근처에 있는 유명한 홍등가가 널려져 있는 것을 도보 10분 거리로 압축해놓았다고 생각하시면 되겠다. 이런 상황에서 본인이 다녔던 국민학교는 더욱 더 내 자신에게 큰 문화적 충격을 던져주었다.

 

비교적 비슷비슷한 가정 환경에서 다녔던 이전의 학교와는 달리 이 곳의 학교에서는 거의 완벽하게 방과후의 활동이 양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즉 아파트에 살고 있었던 아이들의 부모가 갖는 대단한 교육열과 양분되는 그 외 지역의 자유방임적 교육. 그렇기 때문인지 주변에 괜찮다고 여겨지는 학원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나와 내 주변의 다른 아이들은 서로의 부모가 번갈아 데려다 주는 차를 타고 학원에 다녔던 반면에, 다른 아이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미친 듯이 놀다가 해가 지고 나서야 집에 들어가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사용하는 내 물건[각주:3]이 다른 아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임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고, 주류 세력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들보다는 주류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예전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던 부잣집 아이들과 유사한 위치에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는지라 이러저러한 책들을 읽으며 이에 대한 단순하지만 의외로 진실에 가까운 잡념들을 계속해서 머리에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제대로 폭발하였던 것은 14대 대선 이후였다.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가 당선이 되고 양친 모두 본적이 전라도였기에 약간은 침체되어있었던 집안 분위기와는 달리 바깥의 모든 사회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김대중은 빨갱이라고 교육받았던 사회의 일원이었기 때문일까? 심지어는 나와 비슷한 집단이라고 생각되었던 아파트 내의 다른 아이들 조차 축제 분위기에 들떠있던 것을 관찰하고 나는 굉장히 낯선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이들의 전혀 다른 모습을 관찰하였기에 나는 더욱 더 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위기감을 깨달았고, 그 때부터 양두구육의 처세술을 익히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포커 페이스의 얼굴을 말이다.

 

나는 내 주위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하였으며 이는 중학교 진학과 더불어서 더욱 심화되었다. 아마 당시에 꽤나 친했던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었더라면 나는 구제 불능의 염세주의자가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될 정도로. 나는 무작위 추첨방식의 중학교 지망에서 지원했던 중학교에 떨어지고 정말로 가고 싶지 않았던 제3지망 중학교에 걸렸다. 그리고 이 학교는 울산 전역에서 꽤나 골치 아픈 중학교로 유명했던 학교였다. 학급의 절반 이상이 인문계 진학이 되지 않아서 실업계로 진학했었으며, 담임들이 꽤나 자주 파출소로 불려 다니기로 유명했었으니까[각주:4]. 그렇기 때문인지 내 자신은 항상 주변의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였으며 이는 꽤나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어떤 기회로 주변의 다른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이들과의 교류를 지속하면서 조금씩은 변해갔던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당시 친했던 친구들의 다수가 실업계에 진학한 것이 그 원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받아들일 것은 존재하며, 이것은 내가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이러한 단순한 사실을 바탕으로 내 자신과 다른 남의 의견이라도 그것은 피력되어야만 한다는 단순하지만 지키기는 어려운 단 한가지 목표를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내 경계의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경계선의 위에 서서 서로 다른 경계의 충돌을 고루 관조할 수 있게 된 계기랄까?

 

이후에 진학했던 고등학교는 비평준화 명문 고교였는지라 비교적 이런 스트레스는 덜 했고, 아주 재미있게 놀면서 보냈다. 그리고 그 남는 시간에 이런 저런 서적을 읽으면서 내 가치관의 큰 틀을 어느 정도 정립하였고. 그러나 성격의 큰 틀은 이미 잡혀있었다고 생각한다. 이후는 그냥 그 길 그대로 나아가는 것 일뿐.

 

나는 삐딱하고,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에 몰두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면을 완전히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어쩔 수 없는 경계인이기 때문이리라. 내 성격은 더럽게 나쁜 것일지도 모른다.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내 자신에 대한 불만이 없다. 이미 그러기에는 너무 오랜 세월 동안 고착화가 되어왔고, 이면을 꿰뚫어보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비록 일상 속의 소소한 행복보다는 불만의 투성이를 먼저 끄집어내는 눈을 갖게 되기는 했지만.

 

나는 경계인이다.

  1. 울산이라는 곳의 이미지가 대규모 공단 지대로 대표되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본인이 처음으로 울산에 도달했을 때는 구시가지 지역을 제외하고는 개발이 미쳐 이뤄지지 않은 도시였다.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울산이 경상남도에서 떨어져 나와서 광역시가 되었을 때부터이다. [본문으로]
  2. 당시에는 도심이었다. [본문으로]
  3. 가장 대표적으로 Nike Air 운동화를 들 수 있겠다. 발 볼이 꽤나 넓은 편이고 약간의 평발 형을 가진 나는 다른 신발을 신을 경우 꽤나 고통을 받았었으니까. [본문으로]
  4. 역설적이게도 내가 알기로 한 해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동시에 입학한 것은 내가 다녔던 때의 이 중학교 출신 밖에 없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