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생존.
비슷한 단어이지만 그 뉘앙스는 상당히 다른 단어이다.
삶이라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를 누린다는 의미를 가진다면, 생존이라는 것은 인간 이전 단계에서 유기물의 생명활동이 유지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본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 두가지가 분리되어 있다고 느낀다.

의사라는 직업적 특성상 환자가 삶을 택해야 하는지 생존을 택해야 하는지 갈등하게 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특히나 말기 암 환자에 있어서 이는 더욱 여실히 드러나는데, 단 하루를 살더라도 인간답게 사는 것을 바라는 이가 있는 반면, 하루라도 더욱 살기위해 생존을 택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환자 개인에게 맡겨져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것은 가능하지 않다. 삶이냐 생존이냐를 택하는 2가지 방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전달하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그 강조 방향이 달라질 수 밖에 없으며, 똑같이 생존을 택하는 방향을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환자의 Q.O.L.[각주:1]을 얼마나 중시하냐에 따라서 그 치료 방향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달, 나는 내 가치관과 전혀 다른 surgeon의 아래에서 일하고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자이고 환자가 삶이냐 생존이냐를 택하는데 있어서는 전적으로 본인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의사로서의 소견으로는 생존보다는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충분한 기대 여명이 남아있는 환자에게 있어서, 삶을 추구하기 위해 생존을 등한시 하는 것은 의사로서의 결격사유라고 생각하지만, 이 기대 여명이 얼마 남지 않는 이들에게 있어서 생존의 연장을 추구하기 위해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 역시 의사로서는 뭔가 부족한 것이 아닐까라고 끊임없이 되묻게 된다.

한 환자가 있다. 자궁경부암으로 자궁과 양측 난소와 골반 부위의 림프절[각주:2]을 제거한 환자로, 이미 자궁경부암이 전신으로 전이되어 흔히들 말기라고 부르는 상황이 된 상태로 이미 전신에 암이 퍼져서 기적이라는 것이 일어나지 않는한 현대의학적 방법으로는 완치 자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환자는 암이 인체의 소변주머니인 방광에 침투하여 정상적으로는 소변을 볼 수 없게되었다. 이 환자의 고통은 오줌이 마려운데 수시간동안 화장실을 갈 수 없었던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공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화장실을 다녀온 이후라면 배변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완전히 소실되는 정상인과는 달리, 이 환자의 경우에는 매일매일 이러한 고통을 수시간씩 느껴야 한다는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과서적인 치료 원칙이라면 CTx
[각주:3]를 기반으로, 증상 유무에 따라 palliative[각주:4] RTx[각주:5]나 수술을 시행하게 된다. 즉, 암의 완전 제거를 목적으로 방광을 제거하기보다는 방광을 둔 채로 이것이 제 기능을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기본적인 치료방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생존보다는 삶에 중점을 둔 치료법이다.

그러나 나는 엊그제 이 환자의 수술에 있어서 내 자신의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방법의 수술이 가해지는 것을 도울 수 밖에 없었다. 의사 사회에서의 최하층에 분포하는 인턴이라는 위치상 이에 치료 방법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찌되었건 환자 자신의 동의를 얻어서 시행되는 수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환자는 자신의 방광과 질, 직장과 항문을 모두 제거받고, 질과 항문은 수술용 봉합사로 꿰메어져서 더이상 제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남은 삶 동안 소변과 대변은 환자의 배를 통해서 낸 장루[각주:6]를 통해 받아낼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미 결혼을 한 남편이 있는 환자이다. 성행위가 인간 생활의 전반을 차지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반려자가 있는 상대에게 있어 성행위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 수술의 결과 환자는 더이상 자신의 반려자와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행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수술 이후 성행위 가능성 감소와 이에 따른 삶의 질 저하가 학회에서도 이야기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결코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물론 이 치료로 인해서 환자의 수명이 수년이라도 늘어났었다면 나도 아무런 갈등을 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미약하기 짝이 없지만 내 나름의 지식을 통해서 판단해 보았을 때, 이미 이 환자의 기대 여명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년을 기준으로 세어나가는 것보다는 개월 수를 기준으로 세어나가는 것이 더 적합한 방식이라고 생각되며, 이러한 상황에서 수술이 환자의 생존에 큰 도움이 되었을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수술의 후유증으로 장루를 통해 감염이 진행되어, 얼마 남지 않은 기대 여명마저도 더 짧아지지나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내가 이러한 경우를 많이 보지 않아서, 아니면 암의 근치를 목적으로 노력하는 의사가 아니라서 이러한 고민을 하는 것일까? 의사가 되어간다는 것에 점점 더 자신감과 신념을 잃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아마도 환자의 수술 부위를 소독하기 위해 환자의 배를 볼 때마다 더해갈 것 같다.

아직은 많이 부족한가보다.
  1. quaility of life, 의료 계통에서 주로 사용하는 약어로 삶의 질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본문으로]
  2. 임파선이라고도 부르는 기관으로 인체 면역계에 있어서 감염의 전신적인 전파를 막기 위한 역할을 한다. 다만 아쉽게도 수많은 종류의 암은 이 림프절을 타고 전신으로 전이된다. [본문으로]
  3. Chemotherapy의 약자로 약제를 이용한 항암치료를 의미한다. [본문으로]
  4. 질병의 완전 제거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증상 완화를 목적으로 하는 치료방법이다. 이러한 치료를 받는다고해서 기대 여명이 늘어나지는 않지만, 남아있는 삶에서의 질은 매우 높아질 수 있다. [본문으로]
  5. Radiotherapy의 약자로 방사선을 이용한 항암치료를 의미한다. [본문으로]
  6. 장루라는 것은 배설기관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장의 일부를 이용해서 배설을 돕는 것을 의미한다. 인체의 정상적인 배설기관에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괄약근이 있어서 대-소변을 가릴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대소변이 생기는 데로 줄줄 새어나오게 된다. 물론 이러한 것을 보조하는 방법으로 비닐로 된 주머니를 이에 부착하여 담아내게 된다. 이것이 별것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구토를 하는 사람의 양쪽 귀에 걸어놓은 검은 비닐봉투를 생각해보라.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끊임없이 토사물이 올라올 때의 그 느낌을. 물론 괴로운 정도야 덜하겠지만 죽는 순간까지 이것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큰 고통임에 다름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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